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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교구의 순교자 시복 시성 담당 신부들의 모임이 주교회의 사무처장 김종수 신부의 주재로 여러 차례 열린 끝에(1998-2000), 2001년 3월 주교회의 춘계 정기 총회는 시복 시성 통합 추진의 청구인(추진 주체)을 ‘주교회의’로 명시하고 담당 주교에 마산교구장 박정일 미카엘 주교를 선출하였다. 신유박해 200주년 기념해인 2001년 10월 18일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안건을 통합적으로 추진해 온 결과, 2004년 7월 5일 시복 조사 법정을 개정하게 되었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박정일 미카엘 주교는 현재 하느님의 종 124위에 대한 문헌 증거 수집과 증인 소환 조사, 현장 조사를 마치고 시복 조사 회기 문서를 정리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하느님의 종 124위는 1791년 신해박해 3위, 1795년 을묘박해 3위, 1797년 정사박해 8위, 1801년 신유박해 53위, 1814년의 1위, 1815년 을해박해 12위, 1819년의 2위, 1827년의 정해박해 4위, 1839년의 기해박해 18위, 1866년과 1868년의 병인-무진박해 19위, 1888년의 1위로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이 시복 추진의 중심에 있다.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의 순교자들은 103위 성인의 추진 과정에 빠졌으나 순교 사실이 새롭게 연구되고 관련 지역에서 현양된 분들이 포함되었다. 1795년 을묘박해 3위 - 윤유일 바오로와 최인길 마티아ㆍ지황 사바는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매를 맞으며 자신들의 목숨을 주님께 바쳤다. 1797년 정사박해 8위 - 정사박해로 인해 이도기 바오로는 1798년에 충청도 정산에서, 방 프란치스코와 박취득 라우렌시오는 1799년에 홍주에서, 정산필 베드로는 같은 해 덕산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1799년에 원시보 야고보, 1800년에는 배관겸 프란치스코가 청주에서 순교하였다. 같은 해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해미에서 순교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53위 - 124위 중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낳은 박해는 역시 신유박해이다. 이해 3월 조용삼 베드로가 경기도 감영에서 옥사하였다. 4월에는 최창현 요한ㆍ정약종 아우구스티노ㆍ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ㆍ최필공 토마스ㆍ홍낙민 루카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같은 날 처형된 이승훈 베드로는 아직 순교 사실에 대한 이론이 있으며, 그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연구가 끝나지 않아 현재 시복 대상에 빠져 있다. 을해박해 직전인 1814년 12월 해미에서는 성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가 옥사하였다. 1815년 을해박해 12위 - 음력 4월에 김윤덕 아가타막달레나가, 음력 5월에는 김시우 알렉시오와 최봉한 프란치스코가, 그해 말엽에는 서석봉 안드레아가 대구에서 순교하였다. 김강이 시몬은 12월에 원주에서 순교하였다. 김희성 프란치스코와 구성열 바르바라ㆍ이시임 안나ㆍ고성대 베드로와 고성운 요셉 형제ㆍ김종한 안드레아와 김화춘 야고보는 대구에서 12월에 순교하였다. 1819년 8월에는 조숙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부부가 서울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1827년 정해박해 4위 - 6월에 전주에서 이경언 바오로가 순교하였고, 11월에는 박경화 바오로, 12월에는 김세박 암브로시오가 대구에서 옥사로 순교하였다. 1835년에는 안군심 리카르도가 대구에서 옥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18위 - 5월에 대구에서 이재행 안드레아ㆍ박사의 안드레아ㆍ김사건 안드레아가 순교하였다. 같은 달 전주에서 이일언 욥ㆍ신태보 베드로ㆍ이태권 베드로ㆍ정태봉 바오로ㆍ김대권 베드로가 순교하였다. 9월에는 최해성 요한이 원주에서 순교하였다. 10월에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1월에 심조이 바르바라가 전주에서 옥사하였다. 12월에 김조이의 어린딸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옥에서 교수되어 순교하였다. 같은 달 원주에서 최 비르지타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866년 병인 박해 19위 - 3월에 청주에서 오반지 바오로가, 대구에서 신석복 마르코가 순교하였다. 12월에는 공주에서 김원중 스테파노가 순교하였다. 청주에서 순교한 장 토마스와 경상도 함안에서 순교한 구한선 타데오는 1866년 어느 달에 순교하였는지 확인되고 있지 않다. 병인박해는 가장 혹독한 박해였기 때문일 것이다. 1888년 4월에는 신앙의 자유가 생겼지만 지방의 인식 부족으로 진주에서 윤봉문 요셉이 순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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