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의 학자들이란 가까스로 학문한다는 이름만 나도, 문득 자긍심만 높아서 하늘(天)이나 이치(理)에 대한 이론이나 펴고, 음(陰)이다 양(陽)이다 지껄이며 벽에다 ‘태극팔괘(太極八卦)’와 ‘하도낙서(河圖洛書)’나 그려놓고는 완색(玩索)하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매한 사람들이나 속여 먹는다. 그러느라 자기 부모가 한창 춥고 배고프다고 호소하고 갈수록 병세가 깊어져도 게으름 피우며 보살펴주지도 않는다. 편안한 마음으로 노동하려는 생각도 먹지 않는다. 그래서 학문에 대한 완색을 부지런하게 할수록 학문과는 더욱 멀어져 버린다. 진실로 부모에게 효도할 수만 있다면 비록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도 나는 반드시 배운 사람이라고 말하겠다”라는 다산정약용의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은 다산이 황해도 곡산(谷山)고을의 원님으로 있으면서 고을 선비들에게 효도를 권하는 글인 「유곡산향교권효문(諭谷山鄕校勸孝文)」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인간이 인간임을 가장 명확하게 증명해주는 일이 바로 부모에게 효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낳아서 길러주고 가르쳐주고, 하늘보다 더 높고 넓은 은혜를 부모에게서 입고도 부모를 효도로 모시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인간됨이 나타날 수 있느냐는 것이 다산의 주장이었습니다.
천리(天理)와 음양(陰陽), 태극팔괘와 하도낙서라는 동양의 높은 철학적 논리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을 연구하고 탐색하는 ‘완색’을 하면 할수록 부모가 추위와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하고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그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일이고 학자의 칭호를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윤리의 가장 근간이 되는 부모를 제대로 섬기는 실용성(實用性)도 없으면서 고도의 학문논리를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습니다.
투철한 윤리의식을 가슴 깊이 새겨 그것을 행동과 실천으로 옮기고, 그러면서 고도의 학문세계도 완색할 수 있어야만 실용주의에도 부합하고 가치 있는 인간의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늙으신 부모 섬기는 윤리의식은 약해지면서 부국강병만 논하고 부자 나라만 된다면 최고의 실용주의가 완성된다는 그런 생각은 다산의 효도론을 읽으면서 새롭게 정리해보면 어떨까요.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장)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