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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7/9 월요미사] "이 정권과 이정권의 하수인들은 백성들과의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DOUGH 2012. 7. 22. 22:30

 

 

 

"우리가 기도하는 모습만 봐도...

 위안 받고... 깨어나고... 좋은 결심 세울 것"

 

2012년 7월 9일 월요미사를 시작하며 ㅣ 김인국 신부

 

여러분, 깊은 마음으로 오셨죠? 아유, 거기 또 가야 하나... 가서 뭐해... 이런 마음으로 오진 않으셨죠?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표현들이 몇 개 있는데 하나는 사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속물사회, 아버지부터 막내까지 다 힘들게 사는 피로사회. 오늘 철학자 강신구는 '한국은 염려사회'라는 표현을 썼더라구요.

 

연금과 보험이 아니면 불안해서 살 수 없는 염려사회, 초등학교 3학년부터 걱정이 시작된대요. 특목고나 자사고에 가야 할텐데, 고등학생들은 명문대에 가야 될텐데, 대학생들은 취업해야하는데, 심지어 직장인들은 오래오래 버텨야 되는데, 직장인들은 또 은퇴 뒤의 불안과 염려. 모든 사람들이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오늘을 살아가기 때문에 내일이 되어도 그리고 모레가 되어도 또 다른 염려 속에, 불안 속에 사로잡혀서 이웃의 괴로움, 어려움 비참함을 거들떠 볼 여력이 조금도 없이 그렇게 전전긍긍 살아가는 사회라고 분석을 하더라구요. 여러분 9일자 경향신문 오피니언에 실린 철학자 강신주의 칼럼을 읽어 보시길 추천합니다.

 

그런데 너 나 없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면, 그 누군가가 연민과 공감의 손을 내밀겠냐는 거에요. 그런 시작이 없으면 우리는 영영 이렇게 상태로 갖혀 지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대한문 앞에서 진행하는 월요미사는 퍽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 모습을 보는 것 자체로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큰 위안을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잠들었던 사람들이 깨어나리라고 생각합니다. 할까말까 번민에 사로잡혔던 사람들도 좋은 결심을 세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달려오심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정권과 이정권의 하수인들은

 백성들과는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강론 ㅣ 김동건 신부(인천교구 인천성모병원)

 

찬미예수님.

 

저번 주에 많이 오셔서 이번 주에는 많이 안 오실줄 알았는데 여전히 많이 오셨어요. 방송국에서도 취재오고... 그래서 좀 떨립니다. PBC, 우리 가톨릭의 자랑스러운 방송입니다. 꼭 내보내 주십시오.

 

저희 가톨릭 신학교는 7년제입니다. 마지막 학년인 7학년을 부제반이라고 합니다. 저희 인천신학교 같은 경우, 부제반이 되면 휴게실에서 TV를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번, 모이자고 이야기 안 해도 모이는 시간이 있습니다. 주일 밤 개그방송 할 때입니다. 꼭 개그방송은 다 같이 모여서보는 행복한 공동체입니다.

 

요즘도 가끔 개그 방송을 보게 되는데요. 그중에서 유명한 코너 중에 '네 가지'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한가지씩이 없는 도합 네 명이 모여 '네 가지'라고 코너의 명칭을 붙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키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뚱뚱한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사투리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그런 단점들을 허심탄해 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통쾌해 하고 그들의 진솔한 모습을 보며 함께 웃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서도 네 가지가 나옵니다. 독서 말씀을 유심히 보다보면 맨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정의, 공정, 신의, 자비. 이 네 가지를 가지고 하느님께서는 한 여자를 자기 아내로 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독서 말씀의 시작은 하느님께서 그 여자를 달래어 다정한 목소리로 광야로 불러 내오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 광야와 네 가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은 혼인과 계약입니다. 이 말씀에서 이야기 하는 여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그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그리고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간 이스라엘 백성의 체험을 계약으로 이야기 하고 이 계약을 새롭게 혼인으로 맺겠다, 라는 하느님의 의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왜 새롭게 계약을 맺어야 하나? 하느님이 아닌 바알이란 헛된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죠. 그랬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새롭게 계약을 맺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다른 예언서와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신을 섬겼는데도 불구하고 그 신을 섬긴 그에게 진노하시거나 격정을 보이시거나 질책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리고 자신과의 사랑은 이야기하시지 않으시고 그 네 가지로 새롭게 계약을 맺고자 하십니다.

 

 

이 계약은 혼인의 모습을 띠고 있죠. 그런데 혼인에는 두 당사자만의 이야기만이 아닌, 그 두 당사자가 앞으로 갖게 될 자녀에 관한 이야기도 분명히 따라옵니다. 하느님께서 이 네 가지의 모습으로 그들을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그들에게 원하는 모습은 바로 이 네 가지의 모습입니다. 자녀를 출산하듯이 하느님과 그들이 맺은 그 계약으로 정의와 공정과 신의와 자비의 모습을 낳아주시길 하느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이죠.

 

이러한 모습이 없다면 하느님의 그 계약에 역행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때 다시 하느님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귀 기울여서 다시 광야로 나아가야할 때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광야에 나와 있지 않은가 바라보게 됩니다.

 

 

이 정권과 이정권의 하수인들이 이 네 가지 중에서 단 한 가지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정의를 무참히 짓밟았고, 공정한 경쟁을 꺾어 버렸으며, 백성들과의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그렇게 무자비한 손길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의 속삭임을 듣고 이 광야에 서서 하느님의 약속을 다시금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정권과 이 정권의 하수인들은 뼛속까지 친일, 친미의 모습으로 이 민족을 짓밟고 자본가들의 하수인이 되어 노동자들과의 신의를 저버렸습니다. 그리고 자본의 노예가 되어 뭇생명과 기본적인 생존권까지 꺾어 버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저버린 이 백성과의 계약은 하느님 의 본질을 무참히 짓밟아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 본질을 지키기 위해 광야에 다시 서지 않을 수 없는 그 모습이, 바로 이곳에 모인 우리입니다.

 

 

최근에 '도시의 광야'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이태리의 한 수사님이 쓰신 책입니다. 그 책의 일부를 강론 마무리로 여러분과 나누고자합니다. 원문의 '나는'이라는 부분을 '그들'이라고 바꿔보았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본질인 생명을 뿌리칠 때

그들이 하느님의 본질인 진리를 뿌리 칠 때

그들이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을 뿌리칠 때

그들은 하느님과 절교하고

삶이 아닌 허무 속으로, 어둠 속으로, 미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은 무슨 엄청난 일을 하려고 하시지는 않는다.

경고를 하는 것 외에는 아무 손도 써시지 않는다.

 

 

  7월 9일 월요미사에 함께하신 신부님들
 

주례 : 장동훈 신부(인천교구 노동.환경 전담)

강론 : 김동건 신부(인천교구 인천성모병원)

 

인천교구 : 김일회, 박병훈, 김종성, 장동훈, 이현수, 박성수 신부

서울교구 : 함세웅, 주수욱, 전종훈, 이강서, 나승구, 이영우, 박동호, 신광호, 나종진 신부

광주교구 : 이영선, 홍진석, 정성종, 변찬석 신부

의정부교구 : 조해인, 정석현 신부

원주교구 : 안승길 신부

청주교구 : 김인국 신부

마산교구 : 하춘수 신부

예수회 : 조현철, 최영민, 김연수 신부

골롬반 : 남승원, 함패트릭 신부

프란치스꼬회 : 박문식 신부

순교복자회 : 변종승 신부

꼰벤뚜알 : 서영섭 신부

 

 7월 9일 월요미사에 함께하신 수도회

 

노트르담 수녀회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베네딕도회

성가소비녀회

성 바오로딸 수도회

성심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예수 수도회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 수도회

예수의 까리따스 수도회

천주섭리 수녀회

 

 

출처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글쓴이 : 사제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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