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대한문 매일미사_0804] 생략된 인간들을 건져내는 길
생략된 인간들을 건져내는 길
강론 장동훈 신부 (인천교구 인천가톨릭대학교)
그런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채우고 또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존재로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인간인지 아니면 역사가 거듭되면서 인간이 그렇게 습관화된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지금 이곳 대한문을 비롯한 반도 곳곳의 아픔과 진통들 역시 이 욕망의 용적률이 무차별적으로 확장되어 생겨났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더욱 이 본성의 기원이 궁금해졌습니다.
밀양송전탑을 둘러싼 수많은 갈등을 익히 들어 알고 또 현장에도 다녀왔습니다. 그제는 그곳에서 누구보다도 많이 아파하며 마을주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신부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어디냐 물으니 밀양을 떠나있다 합니다. 많이 힘들답니다. 집을 떠나지 않고는 쉴 수가 없어서 다 제쳐두고 일단 떠나왔다 합니다. 찡했습니다. 다들 이리도 힘들어하는데 아무 힘도 없는 우리들 처지가 한탄스러웠습니다. 밀양뿐이 아닙니다. 청도, 울산 등 발전소가 있거나 송전로가 지나가는 모든 시골마을, 고작해야 몇 백 가구도 되지 않는 힘없는 노인들이 사는 촌락은 예외 없이 거대한 철골구조물로 흉물스럽게 된지 오래입니다. 그 전기는 어디로 흐립니까? 역설적으로 전기는 그 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도시, 욕망의 용적률이 엄청나게 커진 이들의 안락을 위해서 보내집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야말로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르는 겁니다. 그렇게 전해진 전기로 우리는 겨울을 따듯하게 보내고 여름을 시원하게 보냅니다. 밥도 하고 차도 끓이고 또 여유롭게 음악도 듣습니다. 촌락의 노인들의 눈물이 어쩌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욕망의 용적률을 이해하기위해서는 공급과 수요 사이 생략된 과정을 다시금 상기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전기가 만들어지는 곳부터 이곳까지 전해지는 모든 과정이 우리들 의식에서 삭제되어있는 것에 비극이 존재합니다. 어찌 만들어졌는지, 조상 대대로 깃들어 살던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땅에 기대어 소박하게 살던 이들의 눈물을 짜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하여 정말로 무심하다는 이 사실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인간의 편리, 또 문명 나아가 부는 그 자체로는 윤리적인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물질은 죄가 없습니다. 무죄한 부와 재화는 죄 많은 인간으로 더렵혀지고 죄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고로 우리가 살던 전통사회는 자립생활이 기초를 이루어왔습니다. 땅과 들, 바다가 전해주는 자연의 선물 모두는 이 전통사회 안에서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 풍요로움이 전해주는 것에 기대어 삶을 영위했을 뿐입니다. 그러다 도시가 생겨나고 대규모 생산이 가능해지게 된 것입니다. 좁은 땅에서 살아가려니 자립을 가능케 하는 땅이 부족한건 당연지사입니다. 이러한 도시 생활을 가능하게하기위해 물건을 생산하는 자와 이를 소비하는 자가 생겨난 것입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도 뭔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은 있었지만 기껏해야 생존에 직결되지 않은 귀금속과 같은 사치품에 한정되었습니다. 네팔의 오지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형태의 삶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시화와 함께, 또 자본주의의 확장과 함께 생존을 위한 모든 영역이 공급자와 소비자라는 관계로 편입되었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분리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밥을 지을 쌀을 가지고는 있지만 정작 이 쌀이 만들어진 모든 과정은 생략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내게 전해졌는지 관심두지 않습니다. 건강을 생각해 유기농 음식을 찾는 것에 열성을 다하지만 농약 없이 생산된 재료들을 키웠던 땅에는 무지합니다. 유기농 음식을 소비하기위해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에는 열성이지만 몇 년간을 그 유기농지를 광폭한 개발로부터 지키기 위해 싸워온 농민들의 애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농민에게도 관심이 없으니 이 모두를 허락한 조물주에게 감사할일은 만무합니다. 완벽하게 과정이 생략된 것입니다. 모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생산과 소비 사이의 생략은 더 큰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곧 재화와 그 재화를 사용하는 인간 간의 전도입니다. 재화를 사용하는 자는 이제 재화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재화의 노예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과정의 생략’은 이렇게 ‘관계의 왜곡’으로 귀착됩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1독서의 코헬렛의 입을 빌리지 않고도 이것만치 허무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예수는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길 원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예수가 살던 이천년 전에는 아직 전통사회의 삶의 방식이 지배적인 시대였다고 생각한다면 예수의 이러한 통찰은 매우 예리하고 예언적이기까지 합니다. 물질과 인간의 전도를 경고한 말씀입니다. 생명이 재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재산이 그 재산을 부리는 생명, 곧 인간에게 있어야함을 누구보다도 먼저 깨달은 자가 예수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이 관계의 왜곡을 일으킨 ‘과정의 생략’을 경고하고 복원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과정이 생략되다 보니 그 안에 깃든 인간도 생략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두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이기를 포기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넓어진 욕망의 용적을 억지로 줄이자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정말 이제는 그 과정 중 생략된 사람들을 보자는 초대입니다.
도시생활에 지치고 또 이러한 물질에 경도된 도시 생활이 끔직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그렇다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길이 이 도시, 다른 말로 사람들의 무리, 이 삶의 애환을 떠나서는 완성되지 않음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몇 년 전 유명한 작가의 ‘지리산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류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도시생활에서 여유 있는 삶을 정리하고 초록에 무쳐 여유 있는 삶을 비슷한 문화수준과 경제수준을 지닌 ‘탈도시인들’과 영유하는 ‘지리산 사람들’의 책에 나온 대안적 삶은 그야말로 대안일 뿐입니다. 대안은 되어도 모두가 살법한 ‘삶’일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재화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싫증난 상품을 다른 새로운 것으로 바꾼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욕망은 어떠해야겠습니까? 이곳 대한문을 찾는 분들이라면 다 아실 거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복원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편리와 생활을 가능케 하는 과정에 깃들어있는 인간에 시선을 둔 살과 피가 있는 욕망일 것입니다. 곧 관계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는 올바른 욕망입니다. 사실 사제들이 이곳에 미사를 차리기 시작했을 때는 생각도 다양했습니다. 누구에게는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라는 노동문제에 대한 해결이 우선이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이웃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으로 공감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19일, 이 자리에서 사제들이 발견한 것은 ‘정리해고 분쇄’, ‘원직복직’,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엄청난 단어들이 아니라 그 글자들 안에 깃들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념, 또는 정의 따위의 ‘관념’이 아니라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부산 사는 윤충렬 형제는 자녀가 몇 명이고 박정만 형제는 군대에서 세례 받고 난생 처음이곳에서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사실, 복기성 형제는 몸이 많이 좋아졌고 고동민 형제는 눈물도 많지만 웃음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이곳에서 이렇게 과정에 깃든 사람에 시선이 갔고 오늘날 자본주의가 쓸모없이 폐기해버린 관계들을 소중히 그리고 꾸준히 복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념이나 신념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무쇠처럼 차가운 정의는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정치’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한문이 선의 진영이기에 이곳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이 이유라면 아무것도 살리지 못할 ‘의협심’일 뿐입니다. 대한문에 우리가 서있는 이유는 내가 사람이고 그도 사람이고 우리가 모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천착할 곳은 이 과정에 깃든 생략된 인간들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마음 써야할 것은 이 비뚤어지고 뒤집힌 관계를 온전히 복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사람’이고 정치가 아니라 타인의 삶의 애환을 내 삶의 애환으로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가 보여준 삶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욕망인 것입니다.
어느 날 저는 이국의 친구에게 요즘의 근황을 전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벗이여. 나는 매일 이곳 대한문에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라는 낱말에 살을 붙이고 피를 더해 매일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아. 그래서 충만해졌고 부자가 되었어.” 우리는 세상 안에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들이며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 것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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