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대한문 매일미사_1008] 노동자와 농민이 없는 세상은 살 수 없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없는 세상은 살 수 없습니다
강론 이영선 신부(광주교구 노안성당)
농촌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랑 주로 하는 얘기는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논을 보면 중간중간에 움푹 패어있곤 합니다. 그게 며루 먹어서 그런 것이거든요. 그래서 “며루 피해는 있소? 나락은 얼마나 나겄소? 탈곡은 언제 하요? 마늘은 심었소? 김장 배추나 무는 얼마나 심었소? 벼 베고 나면 보리나 밀은 심을라? 올해는 쌀 한 가마니에 을마씩 할랑고?” 그런 이야기들 하면서 농사짓고 삽니다.
한쪽 귀퉁이에서는 천연 화장품, 천연 해충 기피제, 유황압제 만들기와 토착 미생물 활용법 등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도시에 와서 도시 사람들과 미사를 드리려면 무엇을 이야기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시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떻게 사는지 안부를 묻는지 몰라서 조금 불편합니다.
그래도 저희 할머니들하고 미사드릴 때 항상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비정규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콜트콜텍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밀양할머니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동네에도 몇 년 전에 송전탑 때문에 고생을 해봐서 “밀양에서 그런 일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어요”하면 다들 금방 알아듣습니다. 내일은 탈핵희망버스를 조직해서 가려고 했더니 태풍이 또 쉬게 하네요.
요즘은 할머니들과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50년 전에는 나무로 불 때고 살았는데 나무로 불 때고 살았는데, 어느 날 연탄이 나와서 연탄 아궁이 불 때다가 가스 중독되서 죽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 다음엔 석유곤로도 쓰고 이젠 전기도 쓰고…… 이렇게 얼만큼 우리가 편하게 살게 되었는데 그 세월이 약 50-60년 되었다고 할머니들도 끄덕이십니다. 그러면 그 다음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한번 생각을 해보자고 물으면 할머니들의 상상력은 거기서 멈춥니다. 우리들은 그 때 어떤 상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다음 세상.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를 겪은 50-60년, 그리고 그 다음 세상.
저희 본당이 100년이 조금 넘은 본당입니다. 그래서 100주년 기념식을 하면서 “앞으로 100년 동안 새롭게 인류가정을 위해서 매일 기도하면 좋겠습니다”라고 해서 매일 오후 3시에 인류가정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대도시에 사는 노동자분들이 보통 시골 할머니들의 자제들이시지요. 그래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도시의 노동자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시골에 있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우리가 매일 미사 때마다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라는 말 외에는 여러분들께 드릴 위로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들게 하루하루를 견디듯이 살아가시는 대한문의 노동자 여러분, 그리고 밀양의 할머니들,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여러분을 잊지 않고 늘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위로의 말씀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길거리로 내몬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저는 종교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우리를 이렇게 길거리로 내몬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알아차리고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마음이 생기라고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용서를 청해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바뀌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지도자에게도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패션쇼는 모델들에게 맡기고 이 나라 사람들, 가난하고 특별히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에 마음을 쓰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힘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그냥 둬도 알아서 잘 삽니다. 그러면서 생각해봅니다. 왜 이 나라 사람들을 적으로 만드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면 분노가 배속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옵니다. 그래서 대통령과 이 사람들이 자꾸 적으로 생각됩니다.
저희들 종교인이 세상에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사심 없이 사는 종교인들의 말을 새겨들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자, 농민, 가난한 사람들을 제발 적으로 만들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노동자, 농민들, 가난한 사람들만이 우리를 길거리로 내몬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노동자 농민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자들을 이렇게 푸대접하고 이 나라 사람들을 이렇게 홀대하면서 대통령 노릇을 하면 무엇 하겠습니까? 정치를 하면 또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는 대통령이라 정치인이 없는 세상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이 없는 세상은 살 수 없습니다. 제발 정치하는 사람들이, 힘있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힘없지만 노동자와 농민과 가난한 이 나라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지 말아주시기를 기도하고 부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너무나 소중하고 든든한 버팀목입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야기 복기성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희는 평택공장 앞에서 동료들에게 선전물도 나누어주고 회사에 이제는 대화로서 해결하자는 메시지도 전달하고 또한 대한문에서 새벽부터 늦은 시간까지 기자회견, 집회, 미사, 연대 등…… 하루에 대여섯 군데 정도를 서로 나누어 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지들에게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우비나 우산 하나로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감수하면서 지내더라도, 이것이 현장에 있는 동료들 곁으로 돌아가는 지름길이라면, 오늘보다 더 퍼붓는 폭우가 쏟아지더라도 온 몸으로 맞겠노라는 메시지를 짤막하게 적었습니다.
(여기 남은 동지들) 한 사람 한 사람 너무나 소중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수인원은 매일 미사 때마다 수십 명이, 때로는 백 명 이백 명이 이 땅에 고통 받는 해고노동자들과 쌍용자동차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마음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서로가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단식으로 인해서 몇몇 동지들은 단식원에서 보식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지도 있지만, 이 나라 정부와 회사가 답을 하지 않기 때문에 평택에서 서울에서 여전히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동지들이 있습니다.
우리 수녀님, 교우님, 신부님들의 기도 속에서 평화를 얻고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까지 여러분들과 함께 웃으면서 지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 화단은... 대한문은...
장동훈 신부
저희 신부들 1박2일 밀양에 잘 다녀왔습니다. 여기저기 처절하게 싸우는 현장에 가서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음 동동거리다가 온 것 같습니다.
밀양문제가 9년 동안 지속되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지금 7일째 단식 중이신 조성제 신부님이 김정회 부부가 함께하고 계신데, 사실 일주일 전 이분들이 단식을 위해서 이 자리에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조금 쌩뚱맞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한문이 무엇이라고 밀양사람들이 여기를 올까? 저 무덤, 저 화단이 무엇일까?
저 화단은 쌍용자동자 동지들과 강정, 용산 그리고 그 밖에 이 땅의 많은 힘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이던 곳,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의 출입이 잦은 이 대한문 앞에서 풍경을 헤친다는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구청공무원들이 경찰의 비호아래 몇 톤의 흙을 떨구고 간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쌍용자동차 분향소는 스물네 분의 죽음을 저 흙으로 덮으려 했던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밀양은 좀 쌩뚱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왔을까? 사람이 많이 오니까 왔을까? 혹은 여기서 신부님들이 미사를 하니까 왔을까? 뭘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까? 그런데 이번에 밀양에 가서 이분들이 이 자리에 올 수 밖에 없다는, 아니 어떻게 보면 대한문이 가장 맞는 자리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밀양 때문에 송전탑건설을 취소할 수 도 있는 결정자들 중 하나를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이분 하시는 말씀이 “신부님들이 설득해 주십시오. 교회가 송전탑건설을 반대하고 있는 저 밀양주민들에게 놀아나서는 안됩니다. 제발 설득해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여러 기술적 요인들을 댔습니다. 법적인 이유, 여러 시설을 다시 하기 위해서 걸리는 시간적 이유 등…… 듣다 보면 마치 타당한 듯 들리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자신도 반대할 수 없는 이유 하나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더운 날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에어컨을 틀 수 없는, 간신히 전력난을 겨우 면할 정도의, 아직은 전력이 부족한 이 나라에서 삶의 질에 연관된 전기공급은 꼭 이루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송전탑은 들어서야 한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그 분이 “삶의 질”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저는 참담했습니다. 그 “삶의 질”은 무엇일까? 끈적끈적한 몸을 시원한 기계바람에 의해서 씻기는 것이 삶의 질일까? 아니, 그것이 삶의 질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몇 백년 동안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땅과 자신들의 고유한 삶과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방식들을 송두리째 빼앗겨야 하는 저 마을주민들의 처절함, 그 목숨, 생명이 그렇게도 그가 말하는 삶의 질과 비교할 때 하찮은 것인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한문은 삶의 질과 우리가 서야 할 삶의 진영, 즉 생명의 진영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무덤은 어쩌면 우리들의 욕망덩어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무덤이 스물네 명의 목숨이 사라져도 그럴듯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의 잔재물이 아닐까. 그리고 저 무덤, 저 화단, 경찰이 24시간 지키는 저 유령 같은 죽음은 어쩌면 밀양할머니들이 소박하게 지키고자 했던 자신의 삶의 터전, 삶의 뿌리를 내 삶의 질을 운운하며 가볍게 환산시키려고 하는 우리들의 못난 욕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국정원문제도 우리들의 귀에서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갑자기 NLL대화록 이야기가 다시 수면위로 부상하였습니다. “그 이야기와 이 이야기는 다른 것 같습니다. 이건 생명의 진영에 대한 이야기와 국정원은 정치적인 이야기이고, 이념적인 이야기 아닙니까?”라고 이야기할 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의 이념논쟁들, 색깔론들은 이념이라는 가면을 쓴 욕망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가진 자들이 더 가지려고 하는 욕망의 이름이 바로 색깔론이고, 권력을 쥔 이들이 그 권력에 심취해서 자기 몸이 썩어 문드러져가는지 모르고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들이 만들어낸 것이 이념이라는 욕망이 아닐까 합니다. 욕망의 다른 이름이 이념, 종북좌파, 좌빨, 불손세력,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사회를 교란시키는 나쁜 이들로 둔갑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들의 욕망을 대변하고자 저 대한문 앞 무덤같이 황당하고 비상식적인 것들이 이렇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어찌 할 도리가 없지 않는가?
저는 밀양에서 저 대한문의 무덤과 같은 것을 또 본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삶을 건들지 않았다면 누가 정치를 하는지 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었을 할아버지 한 분이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일제강점기를 경험했지만 집, 재산, 텃밭 다 내놓고, 내 생명까지 다 내놓으라고 하는 나라는 처음 본다고 하셨습니다. 이 나라의 터무니없는 요구들은, 밀양의 희생들은 어쩌면 우리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상처, 욕망이 만들어낸 악취가 아닐까 합니다.
아까 미사의 서두를 열어주신 신부님께서 “문명의 전환기에 서있는 우리들은 무엇을 살 것이고, 무엇을 희망해야 할 것인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밀양 간물생태학습관의 조성제신부님과 동반사제로 계신 신부님은 “이 세상의 잘못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전복이 필요하다. 정치적인 전복이 아니라 체계들의 전복. 즉 문명의 전환기를, 우리들은 곧 그 길을 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가 믿고 있는 성장은 이미 종말 했다고 성장시대의 종말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다른 삶의 패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공존하는 삶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나눌 수 있는 삶, 좀 적게 쓰고도 행복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 그것이 저 흉물스러운 무덤 앞에서 저희가 184일 동안 이야기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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